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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마리아 몬테소리의 생애와 사상, 두번째 이야기

by 파르나소스의 헬렌 2024. 1. 10.

1. 마리아 몬테소리의 생애

앞서 정리했던 마리아 몬테소리의 생애와 사상, 첫번째 이야기에 이어 두번째 이야기로 몬테소리의 삶과 교육이야기를 계속 나누어 보고자 한다. 그녀가 보았던 정신지체 아동들이 먹을 것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 손으로 다루는 무엇인가에 굶주려 있다고 보았던 몬테소리는 정신지체아동들에 대한 교육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는 유아들에 관한 모든 자료를 찾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Itard와 Seguin의 저서를 발견하고 이들에 대하여 깊이 있게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마리아 몬테소리의 사고에 새로운 교육학적 전환을 가져다 주었으며, 미래의 교육 방법과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주게 되었다. 

1900년 몬테소리는 정신지체로 판별되어 수용소로 보내진 유아들과 교사를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국립정상학교로 알려진 교육의학연구소를 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교장으로 2년을 보내면서 Itard와 Seguin이 고안한 교구를 가지고 임상 실험을 하게 되었다. 그녀의 교육적인 지도로 정신지체아들의 지력은 놀랄만큼 향상되었고, 실제로 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녀가 가르친 8세 어린이 몇 명을 국가가 시행하는 읽기와 쓰기 시험에 대표로 내보냈는데, 그들은 정상아등보다 더 나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몬테소리는 "지난 2년의 실습생활이 진정한 나의 첫 번째 교육학 학위였다(Montessori. 1964, p.32)."라고 말하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의사가 아닌 교육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교육방법을 정상아들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교육을 시작하고자 1901년 의학계와 특수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후 인류학, 실험심리학, 교육철학 등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대학교 철학부에 다시 입학하였다. 1904년 몬테소리는 4년 동안 로마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인류학과의 학장을 역임하면서 '교육인류학'이라는 저서를 펴냈다. 1906년 로마대학에서 교사를 위한 훈련코스를 개설하고 교육 인류학에 관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 수업에서 학교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강조하였다. 

1) 판단하기보다는 돕는 교사의 역할

2)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에 영양을 공급하고 정신에 양식을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3) 몬테소리의 학문적 정립과 확장기(1907~1920)

 

19세기 후반의 이탈리아의 로마는 갑작스런 공업화와 도시화로 온갖 사회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빈곤한 농촌의 생활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해 왔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형태의 도시적 빈곤이 있을 따름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을 위하여 아파트와 주택들이 곳곳에 들어섰고 이러한 영향으로 산 로렌조(San Lorenzo)지방에도 많은 주택이 지어졌다 .그러나 공사가 완료되기도 전에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버려진 주택가에는 수 천명의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염병과 매춘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정부에서는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건물에 대한 보수공사가 이루어졌고 직장을 가진 부부들을 입주시켰다. 그러나 부모들이 낮 동안 일하러 간 사이에 혼자 남게 된 어린이들은 복도와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벽과 창 그리고 계단 등을 닥치는 대로 망가뜨리고 파손시켰다. 이들은 어린 무법자였고 난폭자였다. 건물 관리자는 이 어린이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그들을 감시하는 것이 그들에 의해 파손된 것을 수리하고 고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보다 더 경제적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관리자는 몬테소리에게 이 어린이들을 지도해 줄 것을 의뢰했다. 그녀는 허락했고 로마의 빈민촌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어린이들을 모아 돌봐 주는 임무를 맡았다. 

이곳에서 몬테소리는 자신의 교육 이론을 정상아에게 적용해 보고자 했던 소원을 이루게 된다. 몬테소리는 이 새로운 형태의 교실을 '어린이집(Casa dei Bambini)'이라고 부르고 1907년 1월 6일에 개원을 했다. 이 날 아침 그녀는 카톨릭 교회의 미사 시간에 성경구절을 읽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1~4)

 

그녀는 어린이들에게서 어두운 밤하늘에 뜬 별과 같이 빛나는 빛을 보았다. 

어린이집의 운영은 부모가 모두 일을 하고 있는 아파트 주민의 자녀 중 3~6세 사이로 50여명의 정상아를 대상으로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온 아이들은 가난한 가정 출신으로 가정으로부터 방치된 상태였고 지나치게 눈물과 겁이 많을 뿐만 아니라 너무 수줍어해서 말하는 것 조차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며, 어린이집 교구들이 모두 처음 보는 것이어서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들은 영양실조와 신선한 햇빛과 공기의 부족으로 건강상의 고통도 같이 겪고 있었다. 

 

몬테소리는 Itard와 Seguin이 정신지체아들을 위해 고안한 교구를 정상아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수정하여 제시하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면서 몬테소리는 점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하고 반항적이던 어린이들이 교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장난감 대신 교구들을 선택하였다.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하여 몇 번이나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하면서 작업에 임했고 온 정성을 다하여 집중하여 작업하였다. 어린이가 이토록 깊이 있게 집중하는 것은 항상 자신이 선택한 교구와 작업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집중에서 깨어나는 것도 자신으로부터 인한 것이었다. 작업을 끝낸 뒤에 아동은 깊은 행복을 느끼며 편안함, 만족스러움을 나타내었고 깊은 휴식으로 어린이의 눈은 평화롭고 영롱하게 빛났다. 몬테소리는 이러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인격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고 깊은 내면적 만족감으로 침착해져 가는 것에 감동했다. 어느 날 몬테소리는 꼭지원기둥으로 작업하고 있는 3살 된 여아를 관찰했다. 그 어린이는 작업에 깊이 열중하고 있었다. 

꼭지원기둥

 

"나는 그 유아가 자신의 작업인 '꼭지원기둥'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 알아보기 위하여 다른 유아들이 노래하면서 그 주위를 돌아다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 유아의 작업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의자를 집어 올렸는데도 그 유아는 교구들을 자기 무릎에 올려 놓고 같은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순간부터 나는 유아의 작업 횟수를 세기 시작하였다. 그 유아는 무려 42번이나 계속해서 반복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작업을 그만 두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montessori, 1972, p.119)

이러한 현상을 통해 몬테소리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어린이의 정신세계의 깊이를 깨닫게 되었다.

 

몬테소리는 첫 번째 어린이집을 개원한지 3개월 후인 1907년 4월 7일에 산 로렌조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 두 번째 어린이집을 설립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어린이 교육의 대상을 빈곤층에서 중상류층의 자녀와 나이가 많은 어린이로 점점 확대하였다. 몬테소리는 한 아파트에 어린 유아들 학급과 6-9세의 초등학생 학급을 열어 고안한 교구와 교육방법을 적용하였다(Kramer.1988). 산 로렌조에서 실시되고 있는 이 흥미 있는 교육을 들은 많은 교육자, 언론인, 종교인들이 어린이집을 참관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10월에는 처음으로 로마 밖의 밀란에 첫 번째 어린이집이 세워졌고, 1908년 11월에는 로마에 네번째, 다섯번째 어린이집이 중산층과 이웃하고 있는 현대신 건물에 세워졌다. 1909년 1월 스위스의 이탈리아 거주지역에 있는 고아원과 유치원은 프뢰벨의 은물 수업대신 몬테소리 교구와 방법을 사용하는 어린이집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Citt'a de Castello에서 주로 교사로 이루어진 100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첫 트레이닝 코스가 열렸다. 

 

몬테소리가 자신의 교육이론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시기는 불과 5년의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성과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어린이집의 수업을 참관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왔다. 특히 몬테소리가 시작한 교사 트레이닝 과정에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을 방문하여 강연을 하면서부터 전 세계적인 몬테소리 운동이 일어났고, 세계 여라나라에 어린이집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몬테소리 교육이 세계 모든 어린이에게 적용되고 교육될 수 있었던 까닭은 몬테소리가 어린이 생명을 발견하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드러낸 결과 때문일 것이다. 

 

몬테소리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네 곳의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을 지도한 것은 교육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교구를 통한 개별화 교육의 문을 열었고, 유아의 작업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유아의 생명의 발현을 전개시키는 과학적 교육방법을 실천하였다. 

1912년 어린이집에서의 관찰과 발견, 과학적인 교육방법을 적용한 몬테소리 최초의 저서인 '어린이집의 유아를 위한 과학적 교육방법'이 저술되었고, 이는 후에 '몬테소리 교육방법(The Motessori Method)'이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에 소개되었다. 1911년 10월 몬테소리의 미국인 제자 조지에 의해 뉴욕에 최초로 몬테소리 학교가 세워졌으며, 이후 1913년까지 100여개 이상의 몬테소리 학교가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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